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진저우 침공 (문단 편집) == 배경 == 1931년 9월 18일, [[이시와라 간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도이하라 겐지]] 등은 [[류탸오후 사건]]을 조작하여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화북에 주력부대를 주둔시켜서 화북의 지배권을 공고화하려 했던 [[장쉐량]]은 일본의 의도를 오판하여 저항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고 그 결과 심양을 비롯하여 남만주의 핵심지역 대다수가 일본군의 손에 들어갔고 이에 국민정부는 9월 27일, 동북변방 총사령장관 공서와 요녕성 정부를 진저우로 이전하였다. 이에 사령장관 대리 [[장쭤샹]], 동북변방군 참모장 영진 등 일본에 투항하지 않은 봉천군벌의 잔여 세력이 금주에 집결하기 시작하여 전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는데 이에 관동군은 진저우를 공격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10월 8일 오후, 조선군 소속 평양 비행 제6연대 소속 88식 정찰기 2대, 동북군에 노획한 비행기 5대 등 일본군 전투기 12대가 동북 교통대학, 진저우역 등 진저우의 주요 시설에 25킬로그램짜리 폭탄 75발을 투하하여 수십명의 시민이 사망하였다. 일본의 진저우 폭격은 국제적인 논란이 되었고 미국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은 10월 12일, 일본군에 대한 비난성명을 발표했고 10월 24일, 국제연맹 이사회는 일본군에 대한 비난 결의안을 13대 1로 통과시켰다. 진저우 폭격은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에게조차 보고가 올라가지 않은 것이었으며 육군 중앙은 관동군의 폭주에 놀라 이를 저지하려 했지만 [[이시와라 간지]]를 비롯한 관동군 일선 장교들은 눈이 뒤집혀서 중앙의 저지에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어쨌거나 일본 외무성은 진저우 폭격에 대해서 중국 측이 자신들의 정찰기에 사격하여 부득이하게 반격한 것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자신들도 일본의 입장이 대단히 불리해졌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스자오지]] 국제연맹 중국 대표 등은 외교적 총공격을 준비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